본문 바로가기

특산물

순창 고추장의 진짜 맛은 다르다?

1. 고추장의 본고장, 왜 하필 '순창'인가?

대한민국에는 고추장이 넘쳐납니다. 마트 진열대에도, 온라인 쇼핑몰에도 수십 가지 고추장이 즐비하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추장’ 하면 대부분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지역은 전북 순창입니다. 마치 김치 하면 전라도, 막걸리 하면 경기처럼 ‘고추장=순창’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죠. 도대체 왜일까요?

순창 고추장의 뿌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 후기 《동국여지승람》에는 순창 지역에서 재래식 고추장 제조가 활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추장 제조에 최적화된 자연환경도 순창을 '장맛 1번지'로 만들었어요. 순창은 남한강과 섬진강이 교차하는 분지 지역으로, 여름에는 고온다습하고 겨울에는 건조한 기후 덕분에 고추장 발효에 딱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죠.

또한 순창은 옛날부터 집집마다 장독대를 보유한 ‘장 문화의 마을’로 알려져 있어요. 장맛은 가문마다 다르고, 전통은 대를 이어 계승되어 왔습니다. 전국 유일의 장류 전문 테마파크인 '순창 고추장 민속마을'이 존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순창은 단순히 고추장을 ‘잘 만드는 곳’이 아니라, 고추장을 문화로 이어가는 곳인 셈이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먹는 순창 고추장은 그 전통의 연장선일까요? 혹시 현대화된 제조 공정이 전통 고추장과는 다른 맛을 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순창 고추장의 진짜 맛은 다르다?

2. 고추장, 전통 방식과 현대식 제조의 결정적 차이

‘고추장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셨다면, 큰 착각입니다. 순창 고추장이라고 다 같은 순창 고추장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설명드리는 두 방식의 차이를 알게 되면, 입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될 거예요.

전통 고추장은 이름 그대로 '사람의 손'과 '자연의 시간'이 만들어냅니다. 핵심은 ‘메줏가루’입니다.

메주는 콩을 쪄서 발효시킨 덩어리로, 전통 방식에서는 이를 잘게 빻아 고춧가루, 찹쌀풀, 천일염과 함께 항아리에서 최소 수개월 이상 발효시킵니다. 이때 장독대 위 햇볕과 바람, 일교차는 맛을 조절하는 천연 조미료가 되죠.

반면, 현대식 순창 고추장은 대부분 공장형 생산 라인을 거칩니다. 식품안전관리인증(HACCP) 시스템 하에 위생적으로 제조되긴 하지만, 효율성을 위해 메주 대신 탈지대두, 조미액기스,쌀분말 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효 시간도 몇 달이 아니라 며칠~몇 주로 단축되며, 균일한 맛을 내기 위해 정제된 설탕이나 조미료를 혼합하는 일이 일반적이죠.

결정적인 차이는 ‘맛의 깊이’입니다. 전통 고추장은 첫맛은 강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입안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짠맛과 단맛, 그리고 깊은 감칠맛이 특징입니다. 반면 현대 고추장은 상대적으로 ‘즉각적인 단맛과 매운맛’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즉, 전통은 은은하고 복합적인 맛, 현대는 자극적이고 즉시 반응하는 맛이라고 볼 수 있어요.

3. 직접 먹어보면 안다 

이쯤 되면 궁금하실 겁니다. ‘그럼 전통 순창 고추장, 현대식 순창 고추장… 도대체 맛이 얼마나 다른데?’ 하고요.

그래서 실제로 두 가지 버전의 고추장을 들고, 같은 음식에 곁들여 비교해봤습니다.

 

집에서 만든 수육

비빔밥

고추장찌개

 

먼저, 전통 방식 고추장은 고기와의 궁합에서 특히 뛰어났습니다. 기름기 있는 수육과 만나면 짠맛보다는 장맛이 풍미를 끌어올리고, 고기 비린내도 잡아줍니다. 쌈장으로 쓰면 된장과 섞지 않아도 충분히 깊은 맛이 나죠. 비빔밥에 넣었을 땐, 밥알과 재료의 맛을 해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배어들어 ‘자극 없이 오래 즐기는 밥’의 느낌을 줍니다.

반면 현대 고추장은 간편식에 잘 어울립니다. 고추장찌개에 넣자 깊이보다는 매운맛이 먼저 느껴졌고, 떡볶이나 쫄면처럼 단맛이 강한 요리에는 찰떡이었어요. 무엇보다 요즘 입맛, 특히 10~20대가 좋아할 맛이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결론은 이겁니다.
▶ 전통 고추장은 ‘풍미를 즐기는 맛’,
▶ 현대 고추장은 ‘즉각적인 자극을 주는 맛’.

입맛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고추장을 '장'으로 대할지 '소스'로 대할지에 따라 선택의 방향도 달라진다는 걸 직접 느낄 수 있었어요.

 

4. 고추장의 미래, ‘전통과 현대’의 공존 가능성

순창 고추장은 단지 지역 특산물이 아닙니다. 문화자산입니다.
이 문화는 수천 개의 항아리 속에서 발효된 시간과 손맛의 결정체죠.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이상과 다릅니다.
전통 고추장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대량생산이 어렵고, 가격도 비쌉니다.
반대로 현대 고추장은 빠르고 싸고, 맛도 ‘대중적’입니다.
과연 이 두 가지는 공존할 수 있을까요?

다행히 순창은 ‘둘 다’를 선택했습니다.
순창군은 지금도 매년 전통 장 담그기 체험, 장류 축제, 민속장 마을 체험 등을 통해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한편으론 세계 시장에 맞춘 레토르트 고추장을 수출하고 있어요.


실제로 2023년에는 미국, 호주, 베트남 등에 순창 고추장 수출량이 증가했고,

‘비건 고추장’ 같은 차세대 장류 제품 개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건 소비자의 선택이에요.
우리가 고추장을 ‘그냥 반찬 소스’로 소비하느냐,

아니면 시간이 빚은 한국 고유의 발효식품으로 존중하느냐에 따라, 이 문화의 미래도 달라집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너무 빨리 먹고, 너무 쉽게 맛을 정해버리는 건 아닐까?
한 숟갈 고추장에도 수백 년의 시간과 정성이 들어갔다는 걸,
우린 몇 초 만에 판단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요.